추적 – 은신처
지난 해의 겨울이 완연한 형태를 띄기 시작했을 무렵 우리는 이곳에서 도마뱀 비늘 조각을 뉘일 은신처를 발견했다. 영등포의 오래된 재개발 구역, 그 품에 안겨 생을 이어받은 주택은 분명 근래에 개조되었음에도 어느 시점에 고정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아마 1974년 이후로 허물 벗기를 멈췄기 때문일 것이다. 그 덕에 재개발이라는 물리적 침범과 도시의 위협적인 속도감 아래에서도 이곳은 수정되지 않았다. 마치 거푸집 같은 집이었다. 켜켜이 쌓인 세월이 그 틀 안에서 단단하게 잡혀 있었다.
이 오래된 주택에서 우리는 안정감을 마주했다. 그것은 탈각됨과 유실됨이 초단위로 연속되는 변화 속 필연적인 생존 감각이었다. 결국 이곳에서 허물은 몸체에서 탈각되어도 유실되지 않고 여전히 몸체의 일부로서 읽힌다. 읽힌다는 것은 곧 먹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몸체에게서 떨어져 나온 허물을 다시 잡아먹고 이를 양분 삼아 몸체는 또 다른 허물을 만들어 낸다. 그야말로 비유기적 성장을 용납하지 않는 자생(自生)의 공동(空洞). 이곳은 은신처였던 것이다.
은신처 – 껍질
하지만 이곳을 선택한 건 은신처의 안락함 뒤에 숨어 순환의 구조에 위계를 보태거나 익숙한 온기를 쓸어 담기 위함이 아니다. 도마뱀이 자신이 벗어낸 껍질을 먹으며 영양분으로 삼는 행위를 본능적으로 동작하듯이, 몸체와 껍질의 관계를 어떠한 의지에 기대지 않고 뉘여 놓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생과 멸의 절절한 가곡 속에서 미적지근한 여운의 역할을 맡은 껍질의 존재는 어떻게 재단되어야 하는 것인가. 구조에 위계가 없다면 껍질은 가치의 그릇이 될 수 없다. 그 대신 탈각되고 섭취되고 양분이 되고, 다시 탈각되고 섭취되고 양분이 되고. 이 하나하나의 과정을 소실점에 밀어 넣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렇게 축적은 이행되지만 결코 포화되지 않는다. 수많은 소실점에 밀려 궤적이 늘어진다. 늘어지고 또 늘어진다.
껍질 – 추적
이를테면 뻗어낸 손 끝에서 흩어지는 환영 같은 것들. 껍질은 그런 환영의 일종이기도 하다. 늘어진 궤적 위로 껍질이 희미한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것마저 쉬이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추적해야만 한다. 추적은 지난한 작업이다. 임시적으로 구축되는 것의 실체를 뒤쫓는 일이라면 더더욱. 몸체와 껍질 사이를 왕복하는 순환의 관계는 이제 지난한 지속마저 넘어선다. 끊임없는 선택과 뒤따르는 폐기. 그리고 일말의 틈도 허용하지 않으며 전의식적 차원에서 가속되는 일도양단(一刀兩斷).
선택과 폐기의 경계가 전의식에 삼켜진 세계에서 텍스트와 이미지는 유실되지 못하고 퇴적층을 만들어 낸다. 단 아주아주 평평한 스크린과도 같은 퇴적층일 것이다. 단층조차 확인되지 않는 이 거대한 디지털 덩어리는 끊임없이 선택되고 폐기되면서도 갈 곳 잃은 껍질들을 다시 집어 삼켜 몸집을 불린다. 우리는 고고학자조차 될 수 없어 관측자의 숙명을 안고 어떤 지점을 찾아 나선다. 이 거대한 덩어리가, 껍질의 조각체가 몸을 뉘일 곳을 물색한다. 어디라면 이 희미한 형태감이 조금이나마 눈에 담길 수 있을까. 이제 곧 겨울을 지나 봄이 다가온다. 생명이 다시금 숨을 틔우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오게 될, 이 기나긴 순환의 분기점에서 은신처를 찾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