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의 언어는 대상을 인과 사슬 안에 가둔다. 앞선 장면의 결과이자 다음 장면의 원인이 되는 선형적 흐름 속에서 대상은 소모적 도구로 전락한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영상이 지시하는 맥락만을 추적할 뿐, 그 맥락 너머에 실존하는 대상을 온전하게 마주하지 못한다. 이충현은 이런 상황 속 대상을 서사적 도구로 다루던 관성을 탈피하여, 독립된 기표로서 호명한다. 그는 영상이 지닌 직선적 시간의 흐름을 파편으로 조각내, 반복 구조 속에 재배치 하여 사라지는 시간이 아닌 응축된 사건의 결정체로 치환한다.
이러한 시도는 적층의 논리를 따르는 시간적 건축물에 도달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이 과거의 파편들이 켜켜이 쌓인 더미의 꼭대기인 것처럼 〈Absence〉는 기록자인 그의 기억을 재구상하여 전달하지 않고 즉시적으로 쌓여가는 시간의 부피감을 느끼게 한다. 그에 따라 관람자는 영상의 어느 지점을 마주하든 저마다의 기억을 통해 각기 다른 축적물을 만들어낸다. 이는 단순히 시각적 해석을 넘어 관람자가 전시장 내에서 굴곡진 시간의 파편을 재조립해 나가는 촉각적 수용으로서의 새로운 관람 방식을 제안하는 것이다.
서사적 탈피는 신작 〈Resonosynthesis〉에서 기술적 체계와 물질적 환경이 교차하는 지각의 재편으로 확장된다. 실시간 수집된 외부 소리는 데이터로 변환되어 낮은 울림(drone)으로 재구성된다. 관람자는 ‘여기’가 아닌 ‘저기’의 신호를 들으며 순수한 현재가 아닌 지나간 시간 속 압축된 신호들 위에서 감각의 형성과정을 체험하게 된다.
중앙에 위치한 ‘embryo’는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며, 지각이 침투하여 머물 수 있는 시각적 동기화 대상이 된다. 이는 고정된 상징물이기 보다 명명할 수 없는 감각의 태동을 의탁하게 하는 장치로서의 대상이다. 감각은 더 이상 몸에 귀속되지 않고 이 태동적 그릇 속에서 기술적 장치와 물리적 환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긴장감을 남긴다.
그의 작업에서 파편화는 대상을 온전히 마주하기 위한 준비 과정과 같다. 관람자는 시간의 파편 사이를 넘나들고, 스스로 감각 방식을 재구성 해야한다. 이 불편한 탐색은 기술 환경 속에서 사라진 능동적 지각을 깨우는 시도가 된다. 관람자는 주어진 정보를 소비하는 대상을 넘어 기억의 공동 저자이자 감각의 주체로서 자리하게 될 것이다.